파스칼이 "왜 신을 믿는 것이 더 합리적인가" 라는 동기로 제시한 논변이다.
이 논변이 실제로 종교를 갖게 하는 힘은 없다.
즉 이 논변을 보고 누군가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잘 듣지 못할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이 논변에 큰 결함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인간의 기초적인 믿음들이 논리에 의해 획득되거나 변경되는 일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믿음 체계가 비논리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논리 이상의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기초적인 믿음들은 언제나 논리와는 무관하다.
오히려 그것들이 제공된 이후에야 논리라는 것을 사용할 수 있다.
어쩄거나 파스칼의 내기는 대강 다음과 같다.
신이 존재할 경우 신이 존재 X 경우
내가 믿을 경우 천국 어차피 모를 것
내가 믿지 X 경우 지옥 어차피 모를 것
간단히 말하자면, 신을 믿으면 운 좋을 경우 천국을 얻고, 운이 나빠도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신을 믿지 않으면, 운 좋을 경우에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운이 나쁘면 지옥을 얻는다.
왜냐하면,
내가 믿고 신이 존재할 경우 예상되는 기대 효용은 극단적으로 크다.
내가 믿지 않고 신이 존재할 경우 예상되는 기대 효용은 극단적으로 부정적이다.
내가 믿고 신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예상되는 기대 효용은
내가 믿지 않고 신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예상되는 기대효용과 다를 바가 없다.
신이 없더라도 신자가 불신자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일수는 있어도.
신이 없는 경우 불신자의 유익이 있다면, 그가 최소한 진실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경우 어차피 죽으면 땡이므로 아무도 그것이 정말 진실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검증 가능성이 형이상학적으로 닫혀있다.
신이 존재할 개연성과 존재하지 않을 개연성을 5:5 라고 잡더라도,
혹은 개인적인 판단에 따라서 신이 존재하지 않을 개연성을 매우 높게 잡더라도, 예컨데 99:1 정도로 잡더라도
여전히 신을 믿는 것의 기대 효용이 더 높아진다.
99:1 정도의 비율로는 천국/지옥 의 효용의 비율을 커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이 없을 확률을 100% 로 잡거나, 99.9999999999999999....% 로 잡는다면 안믿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제대로 된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믿을 수는 없다.
따라서 신이 있는 지 없는지 100% 확실하지 않다면, 믿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결론이 된다.
이 논변에 대해 많은 반론들이 존재한다. 우선 가장 멋진 반론은
1. 그 신이 어떤 신인지 알 수 없다! 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논변이 이슬람교, 힌두교를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불교를 위해서는 사용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이 반론은 잘못된 논점을 타겟으로 삼고 있다.
이 질문이 구분하고 있는 것은 '신에 대한 믿음' vs '신에 대한 불신' 이 아니라, 어떤 신에 대한 믿음이냐 하는 것이다.
이 반론을 수용하더라도 여전히 '임의의 신에 대한 믿음은 어떤 신에 대한 불신보다도 합리적이다.' 라는 결론이 나온다.
어떤 신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인지의 문제는, 아주 좋은 추가적인 논의의 대상이긴 하지만, 최소한 파스칼의 내기와 전혀 독립적인 문제인 것이다.
이 반론은 마치 다음과 같은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열 개의 제비를 뽑는 게임이 있는데, 열 개중 하나에만 상금이 걸려있다.
그런데 열 개 중 하나를 맞추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예 안뽑는 행위가 조금이라도 더 합리적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그다음 반론은,
2. 신이 존재하더라도 구원의 의사가 없을 수도 있다! 는 것이다.
위의 반론과 이 반론은 구분해야 한다. 위 반론은 '신이 있고, 그가 구원의 의사가 있는 경우가 여러가지이다.' 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이 존재하더라도 기성 종교에서 이야기 하는 것과 전혀 다른 존재일 수 있다. 사실은 사악한 신이 존재해서 일부러 구원 안할 수도 있고,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서 구원이라는 개념 자체를 적용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가능성은 사실 신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과 동등하게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위의 표를 '구원의 의사가 있는 신이 있을 경우' vs '신이 존재하고 구원의 의사가 없거나, 존재하지 않을 경우' 로 바꾸면
모든 것이 동일해진다. 경우의 수가 한가지 더 늘어났다고 해서 전체 확률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경우의 수와 확률은 독립적이다.
우리가 4강에 갈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증대된다고 해서 그럴 확률이 늘어났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물론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구원의 의사를 포함해서 그가 어떤 속성(성격)을 지녀야 하는지의 문제 역시 좋은 논의의 대상이다. 그러나 파스칼의 내기에는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 다음 반론은,
3. 신이 존재한다면, 파스칼의 내기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믿게 된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렇게 믿어봐야 소용 없다! 는 것이다.
이 반론은 신의 성품에 대해 어떤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주장이 맞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반론 역시 파스칼의 논변에 아무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반론은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한 이후에 제기되는 반론이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진심으로 믿도록 노력해야한다는 것이지 믿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다음과 같은 상황과 비교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명제에 우리가 동의한다고 해보자.
"친구를 진심으로 도우면 보상이 주어진다."
그런데 이 명제를 자신의 행위의 동기로 삼게 되면, 진심으로 도울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보상도 받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 사실이 위 명제의 진리치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저 명제가 적절한 '실천적 지침' 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지, 거짓이라는 것이 아니다.
파스칼의 내기와 같은 방식으로 믿는 것이 소용 없다고 느낀다면, 이는 파스칼의 논변이 실천적인 측면에서 유용하지 못하다는 것일 뿐, 참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할 수는 없다. 어떤 것의 유용성을 비판하는 것과 그것의 참을 비판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위 반론은 이 두 비판을 구분하지 못했을 때에만 진지하게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파스칼의 내기 논변에 제기된 반론들은 모두 논점을 잘못 잡고 있는 등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오류들은 파스칼의 논변에 대한 합리적인 거부가 실패해왔음을 보여준다.
파스칼의 내기는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인 지침이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최소한 한 가지를 보여준다.
누군든 신을 믿지 않을 수 있지만, 그가 합리적이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