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tuation 1.
약간의 야근을 마치고 모두들 저녁을 먹으러 갔다. 나는 회사에서 나오자 마자 담배를 꺼내 물었다.
식당에 가기 위해 이사님 차에 타야 해서 그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초라 끌 수가 없었다.
담배를 다 태우고 타려고 밖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이사님 왈,
이사님 : "피우고 들어와"
kevin : "네"
(원래 그러려고 했는데, 나는 약간 뻘쭘해져서 차에서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난다.)
이사님 : "나도 차에서 담배 피우니까"
kevin :"아~ 네"
(그제서야 난 담배를 물고 차에 오른다.)
Situation 2.
엄마가 kevin에게 : "국이 뜨거우니까 식혀서 먹어"
kevin이 여자친구에게 : "차가우니까 식혀서 마셔"
첫 번째 상황에서,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란 말은 밖에서 담배를 다 피우고 나서, 그 행위를 마치고 탑승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사님은 '피우면서' 들어오란 의미로 말씀하신 것. 이어서 말씀하신 내용("나도 차에서 담배 피우니까")과 곧바로 담배에 불을 붙이신 행위가 더해지면서 의미는 더욱 명확해진다. 이 경우, 엄밀히 따지자면 언어를 정확히 구사하지 못한 화법에 해당하며 일정한 상황(context)이 결합되어 같은 어휘가 상반된 의미와 연결되는 경우에 해당한다. 이러한 케이스는 두 번째 상황에서도 확인된다.
우리가 종종 사용하는 '식히다'라는 어휘는 '온도'의 영역에서 모종의 운동성을 내포한다. '식히'는 행위는 맥락에 따라서 뜨거움에서 차가움으로, 또는 그와 반대 방향으로 온도의 수준을 전복시키는 행위다. 동일한 어휘가 상반된, 혹은 모순된 의미를 내포하는 비논리적인 상황.
고대부터 내려온 '동일률'에 따르면, A=A일 수밖에 없다. A가 A인 동시에 not A일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논리적으로 동일률과 모순율이 양립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방금 두 가지 상황에서 확인했듯이 현실은 이와 다르다.
좀 더 생각해보자. 이는 A가 A인 동시에 not A라는 말과는 차원이 다른 개념이다. 이러한 생각은 A라는 개념을 {A=A, A=-A}라는 '실체적 개념'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하지만, 개념이나 어휘는 실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위치한 컨텍스트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관계의 산물'다.

플라톤에 있어 파르마콘은 글(문자)을 비판하기 위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플라톤의 로고스 중심주의적 사고방식에서는(여기서 로고스는 '이성'을 의미한다기 보다 '음성'을 의미한다) '음성'이 '문자' 보다 우월하다. '문자'는 단지 '음성'의 모방(mimesis)에 불과하다는 것. 음성에 대한 모방에 불과한 문자는 '독'이라는 생각이다. 이쯤에서 더 이상의 설명을 하는 것보다 진중권의 글을 인용하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다.
<파에드루스>에서 파르마콘은 글쓰기의 은유다. 소크라테스가 소개하는 이집트의 신화에서 문자의 발명자 토트 신은 파라오 타무스 앞에서 문자의 효능을 자랑한다. “내 발명품은 기억과 지혜의 처방전(파르마콘)입니다.” 하지만 파라오는 문자가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들 것이라 나무란다. “그것은 기억의 치료가 아니라, 이미 발견한 것을 상기시키는 것에 불과해. 지혜에 관한 한, 그것으로 제자들에게 진리가 아닌 그것의 가상(억견)만 심어주게 될걸세.” 여기서 글쓰기는 지성의 파르마콘- 토트에게는 약, 타무스에게는 독- 으로 나타난다.
진중권, [진중권의 아이콘] 소크라테스의 독배(파르마콘, 또는 독과 약), 씨네 21,2010.09.17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3029&article_id=62364)
여기서 중요한 건 파르마콘이 '독'이기도 하고 '약'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아니다. 하나의 동일률을 유지한다고 여겨지는 개념들이 상황이나 맥락에 따라 그와 모순된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즉, 개념은 그 자체로 확고한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타자성까지도 그 흔적으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진중권도 위 글에서 언급하고 있지만(자세한 내용은 위의 링크를 따라 가시라),모든 유형의 실체론을 경계하라는 교훈이다. 이성 vs. 감성, 남성 vs. 여성, 서양 vs. 동양, 순수 vs. 오염, 문명 vs. 야만, 관념론 vs. 경험론, 진리 vs. 거짓, 자본주의 vs. 공산주의, 보수 vs. 진보, ... 지금 우리의 정치 현실 뿐 아니라 일상 생활 세계(LebensWelt)에서 우리가 쉽게 저지르는 오류는 이러한 이분법 가운데 한 쪽을 고수하여 다른 한 쪽을 비판 내지 억압하는 사유와 행위 그 자체다. 이분법의 양 극에 있는 것들을 실체론적으로 생각하고 고집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내용이 아니다. 하지만, 2010년 9월의 마지막 밤에 새삼스럽게 이를 언급하는 것은 지성사의 선배세대들로부터 수십년 동안 회자되었음에도 쉽게 고쳐지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 생활에서, 조직 생활에서, 정치 생활에서, 경제생활에서 우리는 여전히 이분법적 사유의 틀 속에서 실체론적으로 사유하고 있으며, 이러한 고질적인 질병은 무수한 피와 핍박과 소외를 재생산하고 있다.
학부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고민해 왔던 이러한 생각은 지금까지도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결국 실체란 없고, 결코 단순하지 않은(유클리드적이지 않은) 복잡한 관계의 이합집산만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실체에서 관계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관계라는 것 역시 절대적인 존재자로서 간주하여 제 2의 실체화 과정을 생각한다면, 관계 또한 실체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마루야마 게이자부로가 언급하는 이 '전도된 실체론'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그의 표현대로 결국 남는 건 '언어'뿐이고, 관념론도, 실체론도, 관계론도 모두 부정해야 할 대상이고, '유언론(唯言論)'만을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유언론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여전히 '전도된 실체론'의 형식을 다시금 취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지금 새로운 브랜드 전략을 기획하고 있다. 소비자의 상호작용을 무시하는 단순계의 실체론적 사고방식을 탈피하고 (모종의 창발 현상을 전제하는!) 복잡계의 관계론적 사고방식을 취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관계론 역시 비판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확실한 모델과 적용을 통한 성공사례를 만들지 못하는 한 모든 것이 언어적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피곤하다. 글을 쓰고 있는 나는 과연 지금 여기서 일련의 사유를 조정하는 동일한 실체인가, 혹은 상황들 속에서 타자의 흔적을 간직한 비정형의 관계물인가. 담배가 필요하다. 오늘은 이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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