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5일 토요일

슈뢰딩거의 고양이 상자




물리학에서는 현재 상태를 물리법칙에 대입하여,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예측하려고 노력한다. 현재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고 있고 자연 현상을 지배하는 물리법칙을 알고 있으며, 그 물리법칙을 나타내는 방정식을 풀어 해를 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정확하게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뉴턴역학을 기초로 하고 있던 고전 역학에서 그것은 사실이었다. 많은 경우에 정확한 해를 구할 수 없어서 정확하게 미래를 예측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는 많았지만 정확한 해를 구하고도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것은 자연에서는 역학 법칙에 위반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철저하게 인과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전 물리학에서 통했던 인과법칙, 더 이상 양자 물리학에서는 통하지 않게 되었
그러나 양자 물리학에서는 상황이 다르게 전개되었다. 초기조건을 현상을 설명하는 물리법칙인 슈뢰딩거 방정식에 대입하여 미래의 상태를 나타내는 해를 구해보면, 하나의 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해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것은 같은 상태에서 출발해서 같은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고도 다른 상태로 갈 수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예측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라는 문제가 남게 되었다.
 
양자 물리학의 큰 흐름을 결정한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여러 가지 다른 상태가 가능한 입자의 상태는 가능한 여러 가지 상태의 중첩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입자의 상태를 구하기 위해 슈뢰딩거 방정식을 풀었더니, 그 해가 ϵ1의 에너지를 가지는 ψ1상태와 ϵ2의 에너지를 가지는 ψ2의 상태로 나왔다. 그렇다면 이 입자의 상태는 두 상태를 모두 포함하는 ψ=aψ1+bψ2로 나타낼 수 있다.

우리는 이 때 이 입자가 ϵ1의 에너지를 가질 확률과 ϵ2의 에너지를 가질 확률을 계산할 수 있고, 그 에너지의 기대값을 계산할 수 있다. 왜 양자 물리학에서는 입자의 정확한 상태(결과)가 아니라 확률과 기대값이라는 표현을 하는 것일까? 이유는 앞의 광자재판 편에서 설명한 것처럼, 우리가 이 입자가 실제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측정을 하면, 입자의 상태는 두 상태가 중첩된 상태에서 하나의 상태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측정하는 순간 확률이 붕괴하여 입자는 특정한 하나의 상태로 확정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양자 물리학에서는 고전 물리학과 다르게 확률과 기대값으로 결과를 나타내게 되었다.


슈뢰딩거의 사고 실험을 현실로 만들면 이런 형태였을 것이다.
<출처: Anarkman at en.wikipedia.com>
  
전편의 광자 재판에서 다룬 광자가 지나간 경로도 같은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관측하지 않을 때 광자의 상태는 두 창문을 통과하는 두 상태의 중첩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이것을 우리는 광자가 동시에 두 창문을 통과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어느 창문을 통과하는 지를 확인하기 위한 측정을 하면 광자는 두 창문 중의 하나의 창문을 통과하는 상태로 고정되어 버린다. 이런 경우 우리는 광자가 두 창문 중에서 하나만을 통과한다고 했다. 이러한 확률의 붕괴는 측정이 어떻게 물리량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해준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 1/2살았다 + 1/2죽었다??

양자 물리학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에 동의할 수 없었던 아인슈타인슈뢰딩거는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양자 물리학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후, 1935년에 코펜하겐 해석을 반박하는 아주 중요한 사고 실험 두 가지를 제안했다. 하나는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로젠의 이름으로 제안된 것으로, 이들의 이름 머리글자를 따서 EPR 역설이라고 부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슈뢰딩거의 이름으로 제안된 슈뢰딩거의 고양이였다. 슈뢰딩거는 1935년에 독일에서 발간된 <자연과학>이라는 잡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된 글을 실었다.

다음과 같이 우스꽝스런 경우를 생각해 보자. 고양이 한 마리가 철로 만들어진 상자 안에 갇혀있다. 이 상자 안에는 방사선을 검출할 수 있는 가이거 계수관과 미량의 방사성 원소가 들어 있다. 방사선 원소의 양은 아주 적어서 한 시간 동안에 한 개의 원자가 붕괴할 확률과 한 개도 붕괴하지 않을 확률이 각각 50%이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상태가 중첩된 슈뢰딩거의 고양이
<출처: Dc987 at en.wikipedia.com>

만약 방사성 원소가 붕괴하면 가이거 계수관이 방사선을 감지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스위치가 작동되어 연결된 망치가 시안화수소(HCN)산이 들어있는 병을 깨트려서 고양이에게 치명적인 시안화수소산이 흘러나오도록 하는 장치가 되어 있다. 이 상자를 한 시간 동안 방치해 둔 후에 고양이의 상태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양자 물리학에서는 고양이의 상태를 나타내는 파동함수는 살아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파동함수와 죽어 있는 고양이를 나타내는 파동함수의 중첩으로 나타낸다. 다시 말해 고양이는 죽어 있는 상태와 살아있는 상태가 혼합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자를 열어 고양이의 상태를 확인하는 순간 고양이는 살아 있는 상태나 죽어 있는 상태 중의 한 상태로 확정된다는 것이다. 관측하기 전까지는 고양이가 살아있는 상태와 죽어 있는 상태가 중첩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 ---중략---

이 사고 실험은 실재(實在)를 나타내는 ‘흐릿한 모델’을 순진하게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한다. 흔들려서 초점이 맞지 않는 사진과 구름과 안개로 뒤덮인 강둑을 찍은 사진은 다른 것이다. 이 사고실험의 목적은 코펜하겐 해석이 가지고 있는 명백한 오류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의 직감은 어떤 관측자도 여러 가지 상태가 중첩된 상태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고실험 속의 고양이는 여러 가지 상태의 중첩으로 나타내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라는 것이다. 고양이가 특정한 상태에 존재하기 위해서 외부의 관측자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 만약 고양이가 살아 있다면 고양이는 외부의 관측자의 관찰 유무와 관계없이 살아 있던 자신의 모습 만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 아닌가? 아인슈타인은 양자이론의 모순을 부각시킨 이 사고 실험에 매우 만족해했다. 훨씬 후인 1950년에 슈뢰딩거에게 쓴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박스를 열어 눈으로 확인하면 고양이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바로
확인할 수 있다.

라우에(Max T.F. Von Laue, 1879~1960)를 제외한다면 당신은 실재에 대한 엉성한 가설 주위를 맴돌지 않는 유일한 정직한 사람입니다. 과학자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실재를 가지고 얼마나 위험한 장난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실재는 실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양이를 포함한 전체 시스템이 살아 있는 고양을 나타내는 파동함수와 죽어 있는 고양이를 나타내는 파동함수의 중첩으로 나타내진다는 그들의 설명은 당신의 고양이+방사성 원소 + 증폭기 + 화약을 이용한 사고실험으로 거부되었습니다. 고양이의 상태가 관측의 유무와 관계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확실한 사실입니다.

참고로, 원래 슈뢰딩거가 제안한 고양이 상자에는 화약이 들어 있지 않았고 대신 가이거 계수관과 독약이 들어 있었다. 화약은 15년 전에 슈뢰딩거와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눌 때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것이었다. 


슈뢰딩거와 아인슈타인 덕분에, 코펜하겐 학파는 ‘관측’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었다
코펜하겐 해석에 의하면 여러 가지 상태의 중첩으로 나타내지는 체계는 측정이 실시되는 순간 하나의 상태로 확정된다. 따라서 상자가 닫혀 있는 동안에는 죽은 고양이의 상태와 살아 있는 고양이의 상태가 동시에 존재하지만 상자를 열어 고양이의 상태를 확인하는 순간 고양이는 두 가지 상태 중의 하나의 상태로 확정돼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만으로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제안한 슈뢰딩거나 아인슈타인을 설득시킬 수 없었다.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관측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따라서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양자 물리학에서 관측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 실험이 제안된 후 이것을 설명하는 많은 이론들이 제안되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에 대한 다양한 설명은 지면 관계상 다음 이야기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곽영직 / 수원대학교 자연대학장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켄터키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수원대학교 자연대학장으로 있다. 쓴 책으로는 <과학이야기> <자연과학의 역사> <원자보다 작은 세계 이야기> 등이 있다.

발행일 
2009.12.18
[출처] 슈뢰딩거의 고양이|작성자 휘몰이꾼

파르마콘


Situation 1.

약간의 야근을 마치고 모두들 저녁을 먹으러 갔다. 나는 회사에서 나오자 마자 담배를 꺼내 물었다.
식당에 가기 위해 이사님 차에 타야 해서 그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초라 끌 수가 없었다.
담배를 다 태우고 타려고 밖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이사님 왈,

이사님 : "피우고 들어와"
kevin : "네"
(원래 그러려고 했는데, 나는 약간 뻘쭘해져서 차에서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난다.)
이사님 : "나도 차에서 담배 피우니까"
kevin :"아~ 네"
(그제서야 난 담배를 물고 차에 오른다.)

Situation 2.

엄마가 kevin에게 : "국이 뜨거우니까 식혀서 먹어"
kevin이 여자친구에게 : "차가우니까 식혀서 마셔"


첫 번째 상황에서,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란 말은 밖에서 담배를 다 피우고 나서, 그 행위를 마치고 탑승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사님은 '피우면서' 들어오란 의미로 말씀하신 것. 이어서 말씀하신 내용("나도 차에서 담배 피우니까")과 곧바로 담배에 불을 붙이신 행위가 더해지면서 의미는 더욱 명확해진다. 이 경우, 엄밀히 따지자면 언어를 정확히 구사하지 못한 화법에 해당하며 일정한 상황(context)이 결합되어 같은 어휘가 상반된 의미와 연결되는 경우에 해당한다. 이러한 케이스는 두 번째 상황에서도 확인된다.

우리가 종종 사용하는 '식히다'라는 어휘는 '온도'의 영역에서 모종의 운동성을 내포한다. '식히'는 행위는 맥락에 따라서 뜨거움에서 차가움으로, 또는 그와 반대 방향으로 온도의 수준을 전복시키는 행위다. 동일한 어휘가 상반된, 혹은 모순된 의미를 내포하는 비논리적인 상황.

고대부터 내려온 '동일률'에 따르면, A=A일 수밖에 없다. A가 A인 동시에 not A일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논리적으로 동일률과 모순율이 양립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방금 두 가지 상황에서 확인했듯이 현실은 이와 다르다.

좀 더 생각해보자. 이는 A가 A인 동시에 not A라는 말과는 차원이 다른 개념이다. 이러한 생각은 A라는 개념을 {A=A, A=-A}라는 '실체적 개념'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하지만, 개념이나 어휘는 실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위치한 컨텍스트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관계의 산물'다.

플라톤은 대화편 <파에드로스>에서 하나의 어휘(lexicon)가 양립할 수 없는 모순(contradiction) 관계를 내포하는 상황을 언급한다. 파르마콘(pharmakon)이라는 어휘가 그것인데, 이는 '약'인 동시에 '독'을 의미한다. 상식적인 수준에서도 약은 잘 처방하면 정말로 '약'이 되지만, 그렇지 않고 잘못 처방하거나 오남용을 하면 '독'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그 상황이 중요한 것이다.

플라톤에 있어 파르마콘은 글(문자)을 비판하기 위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플라톤의 로고스 중심주의적 사고방식에서는(여기서 로고스는 '이성'을 의미한다기 보다 '음성'을 의미한다) '음성'이 '문자' 보다 우월하다. '문자'는 단지 '음성'의 모방(mimesis)에 불과하다는 것. 음성에 대한 모방에 불과한 문자는 '독'이라는 생각이다. 이쯤에서 더 이상의 설명을 하는 것보다 진중권의 글을 인용하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다.  

<파에드루스>에서 파르마콘은 글쓰기의 은유다. 소크라테스가 소개하는 이집트의 신화에서 문자의 발명자 토트 신은 파라오 타무스 앞에서 문자의 효능을 자랑한다. “내 발명품은 기억과 지혜의 처방전(파르마콘)입니다.” 하지만 파라오는 문자가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들 것이라 나무란다. “그것은 기억의 치료가 아니라, 이미 발견한 것을 상기시키는 것에 불과해. 지혜에 관한 한, 그것으로 제자들에게 진리가 아닌 그것의 가상(억견)만 심어주게 될걸세.” 여기서 글쓰기는 지성의 파르마콘- 토트에게는 약, 타무스에게는 독- 으로 나타난다.
진중권, [진중권의 아이콘] 소크라테스의 독배(파르마콘, 또는 독과 약), 씨네 21,2010.09.17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3029&article_id=62364)

여기서 중요한 건 파르마콘이 '독'이기도 하고 '약'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아니다. 하나의 동일률을 유지한다고 여겨지는 개념들이 상황이나 맥락에 따라 그와 모순된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즉, 개념은 그 자체로 확고한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타자성까지도 그 흔적으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진중권도 위 글에서 언급하고 있지만(자세한 내용은 위의 링크를 따라 가시라),모든 유형의 실체론을 경계하라는 교훈이다. 이성 vs. 감성, 남성 vs. 여성, 서양 vs. 동양, 순수 vs. 오염, 문명 vs. 야만, 관념론 vs. 경험론, 진리 vs. 거짓, 자본주의 vs. 공산주의, 보수 vs. 진보, ... 지금 우리의 정치 현실 뿐 아니라 일상 생활 세계(LebensWelt)에서 우리가 쉽게 저지르는 오류는 이러한 이분법 가운데 한 쪽을 고수하여 다른 한 쪽을 비판 내지 억압하는 사유와 행위 그 자체다. 이분법의 양 극에 있는 것들을 실체론적으로 생각하고 고집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내용이 아니다. 하지만, 2010년 9월의 마지막 밤에 새삼스럽게 이를 언급하는 것은 지성사의 선배세대들로부터 수십년 동안 회자되었음에도 쉽게 고쳐지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 생활에서, 조직 생활에서, 정치 생활에서, 경제생활에서 우리는 여전히 이분법적 사유의 틀 속에서 실체론적으로 사유하고 있으며, 이러한 고질적인 질병은 무수한 피와 핍박과 소외를 재생산하고 있다.

학부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고민해 왔던 이러한 생각은 지금까지도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결국 실체란 없고, 결코 단순하지 않은(유클리드적이지 않은) 복잡한 관계의 이합집산만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실체에서 관계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관계라는 것 역시 절대적인 존재자로서 간주하여 제 2의 실체화 과정을 생각한다면, 관계 또한 실체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마루야마 게이자부로가 언급하는 이 '전도된 실체론'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그의 표현대로 결국 남는 건 '언어'뿐이고, 관념론도, 실체론도, 관계론도 모두 부정해야 할 대상이고, '유언론(唯言論)'만을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유언론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여전히 '전도된 실체론'의 형식을 다시금 취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지금 새로운 브랜드 전략을 기획하고 있다. 소비자의 상호작용을 무시하는 단순계의 실체론적 사고방식을 탈피하고 (모종의 창발 현상을 전제하는!) 복잡계의 관계론적 사고방식을 취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관계론 역시 비판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확실한 모델과 적용을 통한 성공사례를 만들지 못하는 한 모든 것이 언어적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피곤하다. 글을 쓰고 있는 나는 과연 지금 여기서 일련의 사유를 조정하는 동일한 실체인가, 혹은 상황들 속에서 타자의 흔적을 간직한 비정형의 관계물인가. 담배가 필요하다. 오늘은 이 정도로.

파스칼의 내기


파스칼이 "왜 신을 믿는 것이 더 합리적인가" 라는 동기로 제시한 논변이다.
이 논변이 실제로 종교를 갖게 하는 힘은 없다. 
즉 이 논변을 보고 누군가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잘 듣지 못할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이 논변에 큰 결함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인간의 기초적인 믿음들이 논리에 의해 획득되거나 변경되는 일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믿음 체계가 비논리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논리 이상의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기초적인 믿음들은 언제나 논리와는 무관하다. 
오히려 그것들이 제공된 이후에야 논리라는 것을 사용할 수 있다.
 
어쩄거나 파스칼의 내기는 대강 다음과 같다.
 
                                   신이 존재할 경우                               신이 존재 X 경우
내가 믿을 경우                   천국                                             어차피 모를 것
내가 믿지 X 경우               지옥                                             어차피 모를 것
  
 
 
간단히 말하자면, 신을 믿으면 운 좋을 경우 천국을 얻고, 운이 나빠도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신을 믿지 않으면, 운 좋을 경우에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운이 나쁘면 지옥을 얻는다.
 
 
 
왜냐하면,
 
내가 믿고 신이 존재할 경우 예상되는 기대 효용은 극단적으로 크다.
 
내가 믿지 않고 신이 존재할 경우 예상되는 기대 효용은 극단적으로 부정적이다.
 
 
 
내가 믿고 신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예상되는 기대 효용은
 
내가 믿지 않고 신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예상되는 기대효용과 다를 바가 없다.
 
신이 없더라도 신자가 불신자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일수는 있어도.
 
신이 없는 경우 불신자의 유익이 있다면, 그가 최소한 진실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경우 어차피 죽으면 땡이므로 아무도 그것이 정말 진실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검증 가능성이 형이상학적으로 닫혀있다.
 
 
 
신이 존재할 개연성과 존재하지 않을 개연성을 5:5 라고 잡더라도,
 
혹은 개인적인 판단에 따라서 신이 존재하지 않을 개연성을 매우 높게 잡더라도, 예컨데 99:1 정도로 잡더라도
 
여전히 신을 믿는 것의 기대 효용이 더 높아진다.
 
99:1 정도의 비율로는 천국/지옥 의 효용의 비율을 커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이 없을 확률을 100% 로 잡거나, 99.9999999999999999....% 로 잡는다면 안믿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제대로 된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믿을 수는 없다.
 
 
 
따라서 신이 있는 지 없는지 100% 확실하지 않다면, 믿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결론이 된다.
 
 
 
 
 
이 논변에 대해 많은 반론들이 존재한다. 우선 가장 멋진 반론은
 
 
 
1. 그 신이 어떤 신인지 알 수 없다! 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논변이 이슬람교, 힌두교를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불교를 위해서는 사용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이 반론은 잘못된 논점을 타겟으로 삼고 있다.
 
이 질문이 구분하고 있는 것은 '신에 대한 믿음' vs '신에 대한 불신' 이 아니라, 어떤 신에 대한 믿음이냐 하는 것이다.
 
이 반론을 수용하더라도 여전히 '임의의 신에 대한 믿음은 어떤 신에 대한 불신보다도 합리적이다.' 라는 결론이 나온다.
 
어떤 신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인지의 문제는, 아주 좋은 추가적인 논의의 대상이긴 하지만, 최소한 파스칼의 내기와 전혀 독립적인 문제인 것이다.
 
 
 
이 반론은 마치 다음과 같은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열 개의 제비를 뽑는 게임이 있는데, 열 개중 하나에만 상금이 걸려있다.
 
그런데 열 개 중 하나를 맞추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예 안뽑는 행위가 조금이라도 더 합리적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그다음 반론은,
 
 
 
2. 신이 존재하더라도 구원의 의사가 없을 수도 있다! 는 것이다.
 
위의 반론과 이 반론은 구분해야 한다. 위 반론은 '신이 있고, 그가 구원의 의사가 있는 경우가 여러가지이다.' 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이 존재하더라도 기성 종교에서 이야기 하는 것과 전혀 다른 존재일 수 있다. 사실은 사악한 신이 존재해서 일부러 구원 안할 수도 있고,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서 구원이라는 개념 자체를 적용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가능성은 사실 신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과 동등하게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위의 표를 '구원의 의사가 있는 신이 있을 경우' vs '신이 존재하고 구원의 의사가 없거나, 존재하지 않을 경우' 로 바꾸면
 
모든 것이 동일해진다. 경우의 수가 한가지 더 늘어났다고 해서 전체 확률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경우의 수와 확률은 독립적이다.
 
우리가 4강에 갈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증대된다고 해서 그럴 확률이 늘어났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물론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구원의 의사를 포함해서 그가 어떤 속성(성격)을 지녀야 하는지의 문제 역시 좋은 논의의 대상이다. 그러나 파스칼의 내기에는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 다음 반론은,
 
 
 
3. 신이 존재한다면, 파스칼의 내기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믿게 된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렇게 믿어봐야 소용 없다! 는 것이다.
 
이 반론은 신의 성품에 대해 어떤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주장이 맞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반론 역시 파스칼의 논변에 아무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반론은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한 이후에 제기되는 반론이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진심으로 믿도록 노력해야한다는 것이지 믿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다음과 같은 상황과 비교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명제에 우리가 동의한다고 해보자.
 
"친구를 진심으로 도우면 보상이 주어진다."
 
그런데 이 명제를 자신의 행위의 동기로 삼게 되면, 진심으로 도울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보상도 받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 사실이 위 명제의 진리치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저 명제가 적절한 '실천적 지침' 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지, 거짓이라는 것이 아니다.
 
파스칼의 내기와 같은 방식으로 믿는 것이 소용 없다고 느낀다면, 이는 파스칼의 논변이 실천적인 측면에서 유용하지 못하다는 것일 뿐, 참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할 수는 없다. 어떤 것의 유용성을 비판하는 것과 그것의 참을 비판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위 반론은 이 두 비판을 구분하지 못했을 때에만 진지하게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파스칼의 내기 논변에 제기된 반론들은 모두 논점을 잘못 잡고 있는 등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오류들은 파스칼의 논변에 대한 합리적인 거부가 실패해왔음을 보여준다.
 
파스칼의 내기는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인 지침이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최소한 한 가지를 보여준다.
 
누군든 신을 믿지 않을 수 있지만, 그가 합리적이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아방어기제(Defense Mechanism)

① 해리(Dissociation) - 의식세계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성격의 일부가 자아의 지배를 벗어나 하나의 독립된 기능을 수행하는 경우
 
'지킬 앤 하이드'
 
ex) 몽유병, 이중인격, 기억상실증(fugue) 등
 
②? 상환(Restition) - 무의식의 죄책감을 씻기 위해서 사서 고생을 하는 경우나, 잃어버린 대상을 그리워하면서 불행하게 지내는 경우
 
ex) 자신은 가난하고 불행하게 살면서 모든 수입을 자선사업에 바치는 경우,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남편이
 
죽은 아내를 대신 할 만한 여인이 나타날 때까지 불행하게 지내는 경우
 
③ 자기에게로 향함(Turning against the self) - 대개는 공격적인 충동이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
 
ex) 어머니로부터 심한 꾸지람을 받은 아이가 자신의 머리를 벽에 부딪혀 자해하는 경우
 
④ 대치(Substitution) - 받아들여질 수 있는 소망, 충동, 감정 또는 목표가 좀 더 받아들여 질 수 있는 것
 
원하는 것(목표)을 못 갖는 데에서 오는 좌절감과 불안을 최소화하기 위해 원래의 것과 비슷한 것을 가짐으로써
 
만족하는 것
 
ex) 오빠에게서 강한 매력을 느끼는 여동생이 오빠와 비슷한 용모를 가진 사람과 사귀는 경우
 
⑤ 상징화(Symbolization) - 곧바로 의식화하기에는 어려운 어떤 억압된 대상을 의식화 해도 무난한 중립적인 대상으로 바꿈으로써
 
상징성을 부여하는 것
 
ex) 태극기나 무궁화는 대한민국을 상징함
 
⑥ 유리 · 분리(Isolation) - 고통스런 불안을 야기하는 기억과 관련된 감정을 떼어내 버리고 과거의 외상적인 사건을 생각해 내는 것
 
ex)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를 생각해보면 슬프고 충격적이었는데, 이제는 기억은 생생하지만 그에 수반된 감정은
 
억압되고 의식화 되지 않는 경우
 
⑦ 지성화(Intellectualization) - 지식화라고도 하며 감정과 충동을 억제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직접 경험하는 대신에 그것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거나 이야기를 늘어놓는 현상
 
ex) 마음에 드는 여학생에게 제대로 말도 못붙이는 남학생이 친구들과 "사랑이 뭐냐?". "인생이 뭐냐?" 등의 토론을
 
벌이는 것, 사춘기에 철학이나 종교에 심취하는 경우
 
⑧ 저항(Resistance) - 자아가 관여하기에는 너무나 괴롭고 불안한 억압된 자료들이 더 이상 의식계로 떠오르는 것을 막는 기제
 
ex) 상담 시 상담자가 클라이언트의 중요 문제에 접근해 들어가면, 침묵 하거나 갑자기 "기억이 안나요"고 말하거나
 
울어버리는 등 상담을 지연시키는 행위, 그 다음 상담시간에 나오지 않아 상담에 협조를 하지 않는 경우
 
⑨ 신체화(Somatization) - 심리적 갈등이 감각기관이나 수의근계통 이외의 신체증상으로 표출
 
ex) 시험공부를 너무 못한 학생이 시험 전날 밤부터 복통으로 고생하는 경우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자아방어기제(Defense Mechanism) = 자기방어기제, 방어기제

1. 개념
 
 
 
· 자아의 무의식 영역에서 일어나는 심리기제로서 인간이 고통스러운 상황에 적응하려는 무의식적인 노력
 
· 개인이 최적의 정신건강을 유지하려면 각 단계의 위기를 원만히 해결해야 하는데, 이 경우 적절한 방어기제의 사용이 요구됨
 
 
 
2. 방어기제의 특성
 
 
 
· 무의식 수준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우리가 실제로 의식하지 못함
 
· 불안을 덜 느끼게 하기 위해서 현실을 부정하거나 왜곡하는 경향이 있음
 
· 방어의 강도가 어느정도냐의 강도가 중요함 (방어기제의 병리성)
 
·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동원되는 방어기제가 여러개 일 수 있음
 
 
 
3. 방어기제의 종류
 
 
 
① 억압(Repression)
 
의식하기에는 현실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충격적이어서 무의식 속으로 억눌러 버리는 것
 
ex) 어려운 과제가 있을 때, 그 과제를 아예 잊어버리는 경우
 
cf) 억제(Suppression)
 
② 부정(Denial)
 
의식화 되면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적인 상황이나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부정하는 것
 
ex) 임종 말기의 환자가 자신의 병을 의사의 오진으로 주장하는 경우, 지적장애로 태어난 자녀를 인정하지 않는 것
 
③ 반동형성(Reaction formation)
 
겉으로 보이는 언행이나 태도가 실제 마음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나는 것
 
ex)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 사랑을 미움으로 표현하는 경우
 
남편이 바람을 피워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키우면서 과잉보호하는 본부인의 경우
 
④ 투사(Projection)
 
자신의 심리적인 속성이 다른 사람에게도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ex) 바람을 피고 싶은 욕구가 강한데 그것을 부인에게 뒤집어 씌움으로서 배우자를 부정하다고 생각하고 의심하는 경우
 
⑤ 치환(Displacement)
 
충동들을 위협적인 대상에서 '보다 안전한 상태'에게로 이동시켜서 발산하는 것
 
ex) 일상생활에서 무의식적인 공격성을 농담으로 표현, 아버지에게 혼난 것을 마당의 개에게 발길질 함으로 화풀이를 하는 것,
 
무의식적인 죄책감을 씻기 위해서 강박적으로 손을 씻는 경우
 
cf) 전치, 전위
 
⑥ 합리화(Rationalization)
 
상처 입은 자아를 설명하기 위해 타당한 이유를 조작. 즉, 현실에 더 이상 실망을 느끼지 않으려고 그럴듯한 구실을 붙이는 것
 
· 신포도형(Sour grapes) - 어떤 목표를 달성하려 했으나 실패한 사람이 자신은 처음부터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변명함
 
· 레몬형(Sweet lemons) - 자기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이야 말로 바로 자신이 진정 원하던 것이라고 스스로 믿음
 
· 망상형(Delusion) - 원하는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자신의 능력에 대해 허구적 신념을 가짐으로서 실패의 원인을 합리화
 
⑦ 승화(Sublimation)
 
성적 에너지를 일반적으로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데 때로는 칭찬까지 받는 경로로 전환하는 것
 
ex) 강한 공격적 욕구를 가진 사람이 격투기 선수가 되거나, 심한 열등감을 가진 사람이 열심히 공부해서 학자로 성공하는 경우와
 
잔인한 공격적 충동을 가진 사람이 유명한 생체해부학자가 되는 경우
 
⑧ 퇴행(Regression)
 
자신이 좌절을 겪었을 때 아주 어릴 적 수준으로 행동하므로 갈등을 피하려고 하는 것
 
ex) 사랑을 독차지하던 아이가 동생이 태어나 사랑을 빼앗기게 되자 갑자기 대소변 가리기가 안 된다는 지, 더욱 심한 어리광을
 
부리게 되는 것
 
⑨ 내사 · 내면화(Internalization)
 
타인의 가치나 기준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ex) 다른 사람에 대한 적대적이고 분노적인 것을 자기에게로 내면화하면 우울증이 발생
 
⑩ 동일시(Identify)
 
아동의 성역할 행동을 학습하는 발달과정의 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방어적 반응
 
ex) 거세불안을 느끼는 아동이 아버지와 행동을 같게 하는 경우
 
⑪ 보상(Compensation)
 
부족한 점을 감추기 위해 약점을 지각하지 않거나 어떤 긍정적 특성을 발전시키는 것
 
ex) 나폴레옹 콤플렉스(Nanpoleon complex), "작은 고추가 맵다"
 
⑫ 의식화(Ritual)
 
불안과 긴장감을 감소하기 위하여 의례적인 행동
 
ex) 아기가 잠자기 전 취침 의식이나 말하기 전에 기침하는 것
 
⑬ 무효화(Undoing)
 
자신이 죄책감을 느끼는 행동을 무효화하기 위해 정교한 의식화 하기 위한 것으로 인정할 수 없는 생각이나 행동을 부정하기 위한 것
 
ex) 순간적으로 화가 난 엄마가 아이를 때리곤 곧바로 "엄마가 잘못했다, 아팠지? … 미안해 … " 하며 쓰담아 주는 경우
 
cf) 취소 = 원상복귀
 
⑭ 고착(Fixation)
 
다음 단계로 발달해 가는 것이 불안해서 현 단계에 그냥 머물러 버리는 것
 
ex) 어른스러운 행동과 사고를 해야 할 대학생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고등학교 수준의 행동 및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는 것
 
⑮ 전환(Conversion)
 
긴장과 불안이 지속적으로 작용하여 신체적 증상으로 전환되어 나타나는 경우, 너무 긴장하여 또는 강한 충격으로 말이 안나오는 경우,
 
시어머니의 강한 통제와 지배 속에서 감정을 억압하고 지내다가 화병을 앓는 경우
 
ex) 거식증